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나는 네가 / 박상순 나는 네가 시냇물을 보면서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다. 시냇물이 흐르다가 여기까지 넘쳐도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다.나는 네가 목련 나무 앞에서 웃지 않았으면 좋겠다. 흰 목련 꽃잎들이 우르르 떨어져도 웃지 않았으면 좋겠다.나는 네가 밤 고양이를 만나도 겁먹지 않았으면 좋겠다. 밤 고양이가 네 발목을 물어도 그냥 그대로 서 있으면 좋겠다.나는 네가 꿈꾸지 않았으면 좋겠다. 창밖의 봄볕 때문에 잠들지 않았으면 좋겠다. 꿈에서 영롱한 바닷속을 헤엄치지 않았으면 좋겠다.나는 네가 인공 딸기 향이 가득 든 고무지우개라면 좋겠다. 인공 딸기 향을 넣은 딱딱한 고무로 만든 그런 치마만 삼백육십육일 입었으면 좋겠다.나는 네가 오래도록 우울하면 좋겠다. 아무도 치료할 수 없었으면 좋겠다. 그래도 나는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.. 더보기
뼈의 노래 / 문정희 짧은 것도 빠른 것도 아니었어저 산과 저 강이여전히 저기 놓여 있잖아그 무엇에도 진실로 운명을 걸어보지 못한 것이 슬플 뿐나 아무것도 아니어도 좋아 냇물에 손이나 좀 담가보다멈춰 섰던 일맨발 벗고 풍덩 빠지지 못하고불같은 소멸을 동경이나 했던 일그것이 슬프고 부끄러울 뿐 독버섯처럼 늘 언어만 화려했어달빛에 기도만 무르익었어절벽을 난타하는폭포처럼 울기만 했어인생을 알건 모르건외로움의 죄를 대신 져준다면이제 그가 나의 종교가 될 거야 뼛속까지 살 속까지 들어갈 걸 그랬어내가 찾는 신이 거기 있는지천둥이 있는지, 번개가 있는지알고 싶어, 보고 싶어, 만나고 싶어 뼈의 노래 / 문정희 더보기
슬픔의 힘 / 김종미 오래된 검은 벨벳 드레스를 버리듯어느 날 그렇게 슬픔을 버렸다 그것을 동네 떠돌이 고양이가 냉큼 주워 입었다주차장 드문드문 세워놓은 차 밑으로 소심하게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윤기 잃은 검은 털깊이 반짝이는 두 개의 브로치가무척 어울려서 슬프다, 는 것은 아니다 생선 좌판에서 생선 한 마리를 물고 달아나다던져진 쇠막대기에 맞아 늑골이 부러져도늑골이 부러진 슬픔이 어두운 지하창고에서 다리를 떨고 있을 때도그것은 슬픔의 일 바람을 등지고 듣는 음악이내 머리카락을 온통 헐클어 놓는 것이 좋았다 한없이 단정하지만세상은 끝없이 시시해서손목을 긋고도 하루 종일 웃었다 슬픔의 힘 / 김종미 더보기